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유로 선포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시다가 곤하여
배 고물에서 곤히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이 불고 큰 물결의 너울이 일어 물이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두려워하며 주님을 깨어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께서 일어나서 격랑이 일어나는 바다를 바라보시면서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이르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태초에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시던 그 주의 음성이 고즈넉이 바다 위를 울려 퍼지자 전능자의 기운이
온 바다에 임하고, 요동치던 바다는 움직임을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졌습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본문은 아주 중요한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의 선포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때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선포하셨습니다.
선포할 때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선포뿐만 아니라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기 까지
했습니다.
왜 기도 외에 이러한 선포가 필요할까요. 왜 선포할 때에 역사가 나타날까요. 그것은 선포나 손을 잡아 일으키는
행위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늘 그러하듯 건강을 위해서 밖에서 운동을 하고 들어와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선포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려 기도했으니 그 부분의 감동하심을 구했지요.
마음의 기도로 시작하였으나 어느 순간 영의 문이 열리고 주님이 계신 영의 에덴동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이 고요히
물어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살아 있느니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네 속에 온 우주의 만물 속에 나는 충만히 임하여
있느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의 삶의 어려움으로 나의 살아 있음을 의심한다. 하지만 육은 껍질이고 영이 존재의
본질이니 삶의 어려움으로 나의 살아있음을 의심함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믿는 자의 하나님이 되어 준다. 네가 나를 믿느냐?”
“다윗이 믿음으로 골리앗을 향하여 나아간 것처럼 믿음으로 행하라. 믿음으로 행하는 그곳에 능력이
나타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를 향한 주님의 물음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때로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주님은 하나님이시니 의지하는 이름 없이 그냥 명하셨으나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할 수 있습니다.
해결 받아야 할 문제가 있으면 간절히 기도하며, 육신의 정욕과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닌 거룩한 소욕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한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일이라면 환경의 문이 열리고 격랑 일던 바다는 잠잠해 질
것입니다.
막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