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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선교사의 고충을 아는가? (1)

[불꽃칼럼] 부인 선교사의 고충을 아는가? (1)

 

부인 선교사의 고충을 아는가? (1)

 

 

최근에는 주변에서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생경(生硬)한 일들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선교지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아픔들이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전에는 동일한 일들을 목격했어도 그것으로 인해 마음 깊이 사무치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저 단순하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참 안 된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최근의 일들은 단순한 마음의 아픔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아픔으로 강하게 느끼고 있다.

선교지에서는 지금 부인 선교사들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남편을 사랑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사명지까지 따라 왔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이유로 생경한 삶을 견뎌내기가 여간 고충(苦衷)스러운 일이 아니다. 직접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하여 자기의 뜻과는 상관없이 남편을 따라 낯 설고 물 설은 나라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살아 간다는 것이 이만저만 힘겨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자신의 고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일을 묵묵히 참아야 한다. 참는 것만이 부인 선교사들이 가져야 할 미덕으로 여기고 있는 것만 같다. 만일 참지 못하고 자신의 고충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라도 하면, 자칫 믿음이 없는 선교사라고 매도(罵倒)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에게 쏟아질 온갖 비난과 질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기에 묵묵히 참고자 몸부림칠 때가 많이 있다.

물론 모든 부인 선교사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부인 선교사는 자기의 남편 선교사보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경우도 있다. 이런 부인 선교사는 자기 남편을 설득하여 함께 사명지를 찾아 간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부인 선교사들은 별다른 부르심을 느끼지 못한채, 남편을 따라 생경한 나라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이렇게 시작한 부인 선교사들의 삶은 한 없이 고달프고 힘겹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을 수 없어 지금 병들어 가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최근에 어떤 한인교회 목회자가 사명지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 갔다. 그를 나는 2년 반 전에 직접 만났었다. 그와 함께 차 한 잔을 나누면서 그에게서 뿜어 나오는 뜨거운 열정을 보고, 느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분이었다. 그가 대륙에서 한인교회를 목회하면서 어려운 일이 왜 없었으랴만 비교적 안정적인 목회로 미래의 큰 비전을 품고 있었고, 성실함마져 느껴져서 마음이 무척 흐믓했었다. 그 후로 별다른 교제를 가진 적은 없었지만 그이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사명지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고 여겼다. 지금도 2년 반전에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고 있기에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명지를 떠나기로 결정한 것을 발표하기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마음을 더욱 안타깝고 아프게 했다.

그가 대륙에서 실시한 한인목회 사역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특히 그의 부인은 많은 교인들에게 신망을 받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어도 그녀로 인하여 교회를 떠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대해주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결국 스스로의 내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여 지쳐 있는 그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겉 모습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원만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여러 가지로 만족할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모두의 좋은 상담자가 되었기에, 고국을 떠난 이들에게 마음의 위로자가 되어 준 그녀는 항상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고, 또 그녀를 따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 못할 고충을 가슴에 담아 둔채 혼자 고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오랫동안 그런 나날을 보냈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녀는 더 이상은 남편의 사명지에서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따라서 이미 지난 해부터 남편을 대륙에 홀로 놔 두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홀로 생활하기 시작했었다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도 그녀의 이런 상황을 눈치 챈 사람들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녀가 고국으로 돌아 가 있는 것은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어쩔 수 없이 돌아 가 있을 뿐, 마음만은 항상 대륙에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이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명지의 생활을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고 내적인 갈등을 견딜 수 없어 고국으로 피양(避襄)한 것이었다. 사람 좋은 모습으로 모두의 마음을 편하게 했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안돈(安敦)하지 못해 결국 사명지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편은 사명지에 홀로 남아서 부르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무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을 수 없었기에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주님께 몸부림쳐 기도했을까?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사명지를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떠나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인이 다시 돌아 오기를 기다렸지만 부인의 마음이 이미 완고하게 돌아섰기에 자신이 사명지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칫하면 이런 경우에는 그의 부인만 비난하기 쉬운 일이다. 남편으로 하여금 부르심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한 채, 그 사명을 접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책임을 모두 부인에게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말 그 부인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일까? 왜 그 부인이 사명지를 떠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일방적으로 그녀만 매도하는 것은 결코 타당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지금도 부인 선교사들에게는 그녀와 동일한 고충으로 괴로워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부인 선교사들이 사명지에서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그들도 평범한 가정주부이기에, 그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바도 평범한 부인의 위치에서 이해하고 공감해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용납해야 한다. 따라서 부인 선교사들의 아픔과 고충이 무엇인지를 살펴 그들을 케어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인을 잘 알지도 못한 채, 겉으로 들어나는 상황만을 볼 뿐 그 감추어진 어려움에는 어떠한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있다. 그저 드러난 부분만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질책하려 한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면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그런 상황을 공감해 주며, 그런 상황에 처한 이들을 용납하고 받아드리는 넉넉한 너그러뭉의 태도가 더욱 절실한 일이다.

앞서 말한 부인 선교사에게는 그녀가 겪어야 했던 마음의 아픔과 고충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그녀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보다는 그녀의 그런 입장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일이 무었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그녀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동의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인은 무조건 남편을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여필종부(女必從夫)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붙들려 강박관념이 생기도록 몰아가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가 부르심의 사명을 따라 부인보다 먼저 선교지로 떠났다. 그가 선교지에서 몇 달을 홀로 머무는 동안, 부인도 자기가 하던 일들을 정리한 후에 남편을 따라 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고국에서의 후원에 대한 불확실성과 현지생활에 적응할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현재 고국에 돌아가서 전에 하던 경제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남편 선교사 홀로 사명지에 남아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지금도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부르심의 사명을 따라 선교지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부인이 따라가길 거부했다. 할 수 없이 부인을 고국에 남겨둔채 홀로 사명지로 가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아내로부터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는 부인이 일방적으로 이혼청구소송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따라서 법원에서는 그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냈으나 사명지에 있었던 그는 법원이 발행한 출석요구서를 받지 못했고, 결국 공판날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인의 이혼청구가 법원에 의해 받아드려졌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가 있다. 그는 부르심을 받아 사명지에서 현지언어를 열심히 배웠다. 2년이 경과하자 그는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교재를 스스로 개발할 정도로 현지언어 능력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이제 그는 현지인들 속에 머물며 현지인들과 함께 어울릴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다. 부르심의 사명을 따라 현지언어를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 갈 위기에 놓여 있다. 이유는 그의 부인이 사명지로 따라 올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 속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부인이 자기를 따라 사명지로 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3년이 채 못되어 그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렇다고 하여 홀로 사명지에서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고국에서 아내와 함께 머물고 있는 자녀들에게도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나타났다. 결국 그는 내년 초에 대륙일주를 여행하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명지를 떠나기로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 듯 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지금도 사명지에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 사명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부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남편과 함께 사명지에서 생활하지 않고 고국에 홀로 남아 있거나, 또 다른 경우에는 남편을 따라 선교지로 갔으나 불확실한 선교지에서의 생활을 염려하여 고국으로 돌아가 생활현장에 뛰어들어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더러는 마지못해 남편과 함께 사명지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녀들의 마음은 항상 고국을 향한 간절함으로 가득한 이들도 적지 않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가? 선교사들의 부인들이 믿음이 없어서일까? 무조건 그들의 행동을 믿음이 없다고 매도하여 비난해도 되는 것일까? 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려고, 한번 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나도 무조건 남편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부부일체라 하였으니, 아내도 함께 부르심이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사명자의 부인은 무조건 남편을 따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하는 것이 당연지사(當然之事)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이고,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지나치게 흑백논리(黑白論理)에 젖어 세상의 모든 일들을 극단적으로 양분하여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의 판단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반대되는 것은 무조건 배척하는 태도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다양성이 있을 수 있고,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와 원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내 생각은 옳고, 내 생각과 배치(背馳)되는 것은 틀렸다고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지도 않으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며 그의 의견을 청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며, 그의 입장에서 그를 좀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생각과 주관에 따라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부인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고충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절실하다. 그들의 극단적인 행동만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 원인부터 규명하고, 바르게 진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바르지 못한 것이라면, 그를 비난하며 정죄할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해소하여, 그녀로 하여금 남편을 따라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을 통해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선교사 부부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보다는, 먼저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살피는 따뜻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정말 그들이 부르심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디 물질만의 지원이랴.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따뜻함이 더 소중한 것임을....

- 다음 이야기가 계속된다.

2006. 11. 29 (수)

글/ 불꽃 石一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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